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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기원과 발전 본문

종교/기독교

기독교의 기원과 발전

일류소통 2019. 8. 8. 20:28

 

 

 

기독교란

 

기독교는 이슬람교, 힌두교 , 불교와 함께 세계 4대 종교중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을 본받아 따르고, 그를 인류를 구원한 메시아로 인식하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다.

 

경전은 신악과 구악으로 구성된 성경이고 전 세계에 약 24억 명의 신자를 보유하고 있어

현생의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종교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따르는 게시의 전통과 역사성을 계승하여 학술적으로는 유대교, 기독교, 나중에 발생한 이슬람까지 포함 한세 종교를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로서 표현된다.

하지만 일부 개신교 신학과 상당수 기독교 종파의 전통주의, 근본주의 신학에서는 학술적 견해와는 달리

이슬람에 대해 아브라함 계통의 계시 종교에 속하지 않는다고 간주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보고 신약성경을 정경(하느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쓴 책)으로 인정하지만, 

유대교는 소수의 메시아주의 분파를 제외하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차이점이 있다. 

 

그래서 유대교 경전인 타나크가 기독교 기준에서의 '구약성경'으로 불리는 것 역시 인정하지 않으며

모세오경의 건위를 매우 높게 보고 신약성경의 가치를 낮게 본다.

 

이슬람과의 차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 성령과 다른 위격을 가질지언정 본성에서는 동일한 유일신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 를 삼위일체라 부른다.

 

삼위일체 교리에 따라 하느님과 동일 본질을 가진 한 예수를 신으로 믿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기독교 종파가 삼위일체 교리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예수를 믿는 종교)는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 개신교 등 기타 소수종파들을 모두 포함한 것이라 한다.

 

 

 

 

그리스도교란 

히브리어 예호슈아 마쉬아흐를 헬라어로 옮긴 것이 예수스 크리스토스이고 이를 한글로 다시 옮긴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호슈야는 '야훼의 구원'이라는 의미가 있고 마쉬아흐는 '기름을 붓다, 바르다'의 의미가 있다.

구약 성경에서 왕과 제사장, 그리고 예언자가 세워질 때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기원 

 

유대교 중 시한부 종말론과 메시아의 재림을 강력하게 믿었던 에쎄 네파이고

기원 원년 부근에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소외받은 자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규합하여 기독교를 창시하였다.

 

초기 기독교 신앙의 전파자들 중엔 예수 그리스도, 사도 베드로, 사도 바오르 등이 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전까지는 영지주의 등의 여러 종파들이 존재했었다.

 

기독교의 시작은 로마 제국과 함께하는데, 예수는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 시대의 사람이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서 4세기 말 로마제국의 기득권을 쥐기 전까진

지도적 위치에 있지 않고 박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예수 그리스도 당시~직후부터 유대교인들을 중심으로 수없이 있어왔지만,

로마제국 하에서 대대적인 박해를 처음 시작한 것은 네로 황제 때였는데,

 

네로 황제가 대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던 이유는 그들의 종교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로마제국 사회에서 미움받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사이비로 취급된 것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전파되던 당시,

기독교도는 사람의 피와 살을 먹는다는 속설이 있어 초기 기독교에 대한 반감의 한 원인이 되었기 때문인데

이것은 최후의 만찬 때의 "빵은 내 살, 포도주는 내 피"라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이 와전되어 일반인들에게 오해를 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기독교 신자들도 초대교회를 비롯해 로마 제국에서 국교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비참하였다. 

차별은 심해지고 신자들을 잡아다가 십자가에 못 박거나 원형경기장에 사자 밥으로 던져 놓았다.

 

한편 유일신교인 기독교는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는 이유로 신격화된 황제 숭배가 포함된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기 일수였고 이는 로마인에게 있어서 반역으로 여겨졌다.

 

이로 인해 64년부터 네로 황제부터 시작하여 기독교를 금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서기 81년~96년)에도 황제가 자신을 신격화하는 경향이 심하여 이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하였고, 그래서 기독교 공인과 국교화 이전에는 신약성경 초기에 등장햿던 일부 교회들은 행방이 묘연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다신교인 로마 제국에서 특히 기독교가 신앙을 이유로 탄압을 받았던 다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공공 의례를 거부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생활습관이 유난히 미움을 받아서이다.

 

로마인들이 매우 중시하였던 수많은 축제나 스포츠 행상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반감을 샀다.

 

기독교 자체를 국가의 문제로 여기는 생각은 적었다고 한다.

서기 110년 트라야 누스 황제는 기독교인들의 행방을 밝히지도 캐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종교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는 탄압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공공연하게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개인의 행동만을 문제 삼는다는 뜻이다.

 

로마 자체가 다신교라서 기독교 이외에도 많은 종교가 공존했기에 종교 자체보다는 '개인의 행동'을 문제로 삼았다.

 

그러나 이를 거부할 경우 법적 조치에 취해지게 되었는데, 기독교인의 대다수는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공공 의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인 측면이고, 실상은 고대 로마제국 이교도들 사이에서 기독교인은 굉장한 증오의 대상이었다.

2세기 중엽부터 기독교가 확실히 뿌리를 박는 시기인 5세기까지도 가뭄, 지진, 기근이나 질병 등 사회에 안 좋은 일이 생기기만 하면 사회의 증오가 억지스럽게 기독교인들에게 향했다는 증거들이 많다.

 

기독교 초기 지도자들은 박해가 심해질수록 예수 재림과 최후의 심판 날이 가까워질 것으로 보고 신앙을 위한 순교를 더욱 장려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기독교의 발전과정

 

3세기의 위 가라 불리는 로마 제국의 불안정 때문에 민중들의 종교적인 욕구는 늘어났고, 기독교 세력은 크게 팽창한다.

 

지역적으로도 북서 아라비아, 페르시아만 연안과 크림 반도, 중앙아시아, 켈트 지방까지 교세가 뻗어나갔다.

 

이와 더불어 많은 황제들이 기독교에 대한 더욱 가혹한 탄압을 시도하였는데,

황제 중엔 셉티무스 시베루스(202년~211년), 막시미누스(235~238년) , 발레리 아누스(257년~260년) 황제 등이 대표적으로 기독교회를 탄압하였다.

 

군인 황제들이 이들을 탄압한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인 단합을 망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에 페르시아에서는 조로아스터교가 국교로 부흥하면서 페르시아 지방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도 있었다.

 

특히 아르메니아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페르시아 황실의 핍박으로 서기 230년과 287년 박해 때 3만 명이나 죽임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군인 황제 시대가 끝난 후에 정권을 잡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역시 전례 없이 강경한 기독교 탄압을 시도하였고

이는 로마 사회의 단합 그리고 황제의 권위의 강화를 위한 탄압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국가의례를 거부하는 기독교인 개인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조직 전체'를 겨냥하여

파괴하려 하여서 기독교가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중도에 퇴위하여 기독교 탄압이 중단되고 이어 즉위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면서 드디어 사회, 정치적 요인으로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합법 종교로 공인한다.

 

그가 공인한 정치적 목적은 기독교의 유일신을 섬기게 하고 로마 황제를 그 유일신과 신도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로

만들어 대중들에게 성인 같은 위치로 공경받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황제를 신적인 위치로 숭배하는 것은 당시 시대에 익숙한 것이었고 이는 이집트의 파라오,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로마 황제는 정식 직함이 아니었고, 공식적으로 공화국인 로마에서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로, 신격화되어도 전통이 약하고 실책을 저지르면 암살을 당하거나 내전이 발발하는 패턴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황제를 유일신의 하느님과 기독교 교회를 지키는 종교의 수호자로 지칭하면서 

오리엔트에서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고자 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여서 기독 게에 대해 친숙하였고 기독교는 오랜 전통과 정교한 신학이론을 갖고 있어 채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은 대성공을 거두어 100년간 지속되었던 황제 암살과 내전 승리자의 황제 계승 패턴이 중단된다.

 

또한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경제적으로 모라토리엄의 해결이 주목적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신전의 은닉금을 털 수 있었고 그 금으로 재무장한 군대와 경제를 안정시켰다.

이때의 금화를 솔리두스라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죽을 때쯤 돼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죄를 씻을 수 있고,

정적 살인 등의 죄를 지어야 하는 황제라는 점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그 시절엔 세례를 죽기 직전에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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