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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역사 (연대기) 본문

종교/기독교

기독교의 역사 (연대기)

일류소통 2019. 8. 9. 13:29

 

 

 

초기 고대 기독교

 

 

초기 기독교는 예수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활동하였다는 때와 그의 죽음 이후 사도들이 교회를 이끌던 1세기 무렵부터 동서교회의 분열 이전까지의 기독교를 뜻한다. 

 

초기 기독교는 베드로, 파울로스와 같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회중을 순회하고 다녔지만 특정한 조직이나, 교리, 건물 등이 없었고 따라서 일치된 신학도 없었으며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는 집단들로 나뉘어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지역마다 많은 회중이 형성되었고, 사도들이 신자들에게 성경의 가르침과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을 따를 것을 교훈화였으며 배교자 혹은 부도덕한 신자에 대해서는 경고하거나 제명해야 됨을 각 회중들에게 권고하고 편지한 내용 그리고 교리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회 연로자들의 회의가 소집되었고,

 

또한 요한에 의해 기록된 요한의 묵시록에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교리 일치 여부와 역사, 

행위들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는 등 신약 성경의 정립 과정을 보면, 

이미 기원 1세기에 매우 체 계회된 조직과 교리가 형성되었으며 완성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초기 기독교는 고대 그리스 - 로마에서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다.

 

사도들이 회중을 이끌었던 시기의 교회를 초대교회(Apostolic church)라고 한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는 기독교 신자여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꾼 꿈의 지시대로 

병상의 방패에 카이로를 그린 후 전투에 승리하자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316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고 그동안 다양한 사상으로 나뉘어있던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였고 단성설을 주장하는 아리우스 파를 이단으로 규정,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형성하였다.

 

380년 2월 27일 테오도시우스 1세는 테살로니키 칙령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다.

 

 

 

 

 

고대 후기 기독교의 분화

 

 

초기 일곱 번의 공의회 과정을 통해 가톨릭 주의가 만들어짐에 따라 

이들과는 다른 신학을 가져 이단으로 배척된 교파들은 분화되어 서로 독자적인 전파와 발전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 파가 이단으로 배척된 이후에도.

칼케돈 공의회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공인하였고 - (양성설)

단성설(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 예수는 단일한 성질을 가진다는 존재라는 주장)을 주장한 콥트 교회, 아비시니아 교회, 야고보 교회,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가탈 록 주의와 결별하여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였고,

 

689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종교회의에서 네스토 리우 스파가 이단으로 배척되자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분리되었다.

아시리아 동방교회는 독자적인 선교를 통하여 당나라까지 기독교를 전파하여 경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중세 기독교

 

 

중세 초기 서유럽과 북유럽, 그리고 동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된다.

 

기원후 423년 성 파트리치오가 아일랜드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5세기 후반에는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북부 등의 서유럽 지역에 있었던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인 클로비스 1세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고,

 

잉글랜드에는 600년 경 켈트족의 기독교 전파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598년 아우구스티누스를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로 파견하였다.

 

820년대 ~ 830년대 초, 브레멘과 함부르크의 대주교였던 안스가르의 선교 사업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바이킹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동유럽의 슬라브족에게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9세기 무렵이다. 

 

동로마 지역 교회인 동방정교회의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는 동로마 제국 미카엘 3세의 후원을 받아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 대모 라바 왕국 등의 동유럽 국가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십자군 전쟁

 

동 서 교회 분열 

 

 

로마제국의 천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4세기 이후 로마제국의 수도가 되고,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자연스레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기독교의 중심지가 된다.

 

11세기까지 기독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로마,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의 5개 지역의

연합체였다.

 

하지만 서로마제국 지역의 왕권 강화와 7세기 이후 동로마제국에 대한 이슬람의 침략, 로마 지역 교회의 독립적 황동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중심의 연합체와 로마교회의 분열이 발생한다.

 

분열의 기점으로 로마제국 교회 중심 대표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대주고(대감독)와 

로마 교회 대주교 간의 상호 파문 사건이 일어난다.

 

동서 로마 지역의 교회 대립 이후,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당시 로마교회의 제4차 십자군이 기독교 지역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략, 점령까지 하였고

로마제국 연합교회의 네 지역 교회와 로마 지역교회의 정말 한 단절을 낳은 결정적 사건이 된다.

 

2002년 1월 4일 ,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는 십자군이 1204년 동로마제국의 수도이자 동방교회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를 점령함으로써 동방교회와의 관계를 정말 단절시킨 것을 공식 사과하였다.

 

 

 

대사부(면벌부)를 판매하는 로마교황청 , 면죄부는 잘못된표현이라 한다

 

 

 

종교개혁

 

 

16세기에 들어 서방교회가 지배하던 서유럽과 북유럽에서 서방교회 종교개혁 지지파와 반대파의 대립과 분리가 발생하였다.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 서방교회 제도권 세력은 로마 가톨릭인 천주교회로,

'개혁 지지파'는 기독교회로 분리되어 서방교회가 여러 개의 고단으로 구성되는 교단 교회가 되었다.

이로 인해 유럽 각지에 개신교들이 세워지는 16세기 종교개혁 시기가 있었다.

 

조직과 기구 중심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서로 분리되어 초대교회 신앙전통에 따라 각 지역과 교회마다 달리하였지만,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인문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의 비판을 탄압하여 자정 능력을 상당수 상실하였고

로마 교황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각국 군주의 불만이 쌓여 있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가톨릭 성직자의 부패와, 성경의 해석에 대한 논란, 대사의 폐단 등의 이유로 개혁된다.

 

특히 당시 가장 큰 논란은 대사 문제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죄는 고해성사로 용서가 되고, 다만 잠 벌을 보속을 통하여 갚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 보속을 면제해주는 것을 대사라고 하는데, 현대에는 주로 기도나 선행 등을 보속으로 한다.

그러나 당시 독일 지방에 선포되었던 대사의 조건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사의 조건중 세 번째 조건의 내용이다.

 

"셋째, 성 베드로 성당 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바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열려 있으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헌금 대신 기도와 대재로 대사를 받을 수 있다."

 

가난한 자는 헌금을 대신할 수단이 있다고 명시하였고, 교황 역시 "헌납자는 각자의 형편에 따라 헌납해야 한다."라고

언급하였으나 대사를 악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성직자들이 등장하였고 곳곳에서 대사 전문 판매원이 출현하는 등 많은 문제가 발생된다.

 

이로 인해 발생한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은 종교개혁의 발단이 된다.

 

1534년,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헨리 8세는 수장령을 반포하여 

"잉글랜드 국왕만이 잉글랜드 교회의 유일한 우두머리"라고 선포한다

 

헨리 8세의 수장령은 같은 해 잉글랜드 교회 내의 주교에 대한 임명권이 국왕에게 있다고 선포한 

주교 서임 법과 함께 로마 가톨릭과의 단절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다섯 솔라에 의지하여 오직 성서와 진실한 믿음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믿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수사 신부인

마르틴 루터는 95개 조 반박문을 작성하여 당시 로마 가톨릭의 대사 남용을 비판, 이후 종교 개혁 운동을 하게 된다.

 

루터와는 별개로 프랑스 리용 출신의 장 칼뱅은 1533년 성경의 잘못된 해석을 이유로 가톨릭에 반하여 

로마 가톨릭을 떠나 칼뱅 교회의 신앙을 출발시켰다. 

 

1536년 3월 칼뱅은 [기독교강요]를 출판하였다.

칼뱅은 이 책에서 이중 예정설과 같은 칼뱅주의 신학을 정리하였다.

칼빈은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모태가 되었으며, 영국 성공회의 신학(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을 정립하는 데 사용된다.

 

로마 가톨릭은 반종교 개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 스스로 자정 노력을 하는 한편, 기독교의 확산에 탄압으로 대응한다.

 

종교개혁에 반발하여 가톨릭 신앙 교리의 명확한 한계를 정립하기 위한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로마 가톨릭과 기독교 종파들은 격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위그노 전쟁, 30년 전쟁과 같은 종교 전쟁을 치렀다.

 

 

 

 

 

대항해시대

 

근대 기독교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가 세계 각국과 무역을 하는 한편,

식민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기독교 역시 세계로 전파되었다. 

한편,  16세기 이후 19세기까지 개신교에는 침례교, 퀘이커, 감리교 등 다양한 새로운 교파가 세워졌다.

 

 

 

 

현대 기독교

 

 

소련 치하에서 억압을 받았던 러시아 정교회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자유로운 황동을 보장받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결과 로마 가톨릭 교회는 현대적인 모습으로 개혁되었다.

 

19세기 동안 미국의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부흥운동이 있었다.

 

대각성 운동이라고도 불리는 부흥운동은 D.L 무디 , R.A. 토레이 , J.W 체프만 등의 부흥 운동가들에 의해 

일어나 개신교의 여러 교파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들은 초교파적 부흥운동을 바탕으로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선교사를 파견한다.

 

20세기에 들어 기존의 신학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는 자유주의 신학, 해방 신학, 기독교 근본주의 등의 신학들이 영향력을 키웠다.

또한 갈라진 교파 간 대화와 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컬 운동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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